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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동남아시아 역사 5편. 미얀마,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by 니루루 2022. 10. 5.

 

1. 미얀마의 민족운동

미얀마의 민족주의 운동은 인도 국민회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920년에는 랭군대학이 설립되어, 이 대학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미얀마는 1937년까지 사실상 인도의 한 주였기 때문에 미얀마의 민족주의 운동은 때로는 인도로부터의 해방운동이 되었다.

 

1921년 불교청년회는 외국의 지배로부터 불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꾀하였고, 세계적 경제공황의 여파가 미친 1930년 하부 미얀마에서 사야 산이 고대왕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1931년 말 런던에서 미얀마의 장래에 관한 원탁회의가 열려 인도분리주의자와 인도 분리 반대파로 의견이 갈라졌으나 결국 바 모의 노력으로 1937년 미얀마를 인도로부터 분리하게 되었다.

2. 타킨 운동

한편 영국지배에 대한 반항으로써 랭군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 중심의 민족주의 운동을 타킨 운동이라고 부른다. 타킨이란 미얀마어로 주인이란 말로 학생들은 "서로 미얀마의 주인이 되자"라고 외치면서 서로서로 타킨이라고 불렀다. 타킨 운동 지도자들이 가장 강력한 반영 세력이 되었다.

3. 아웅 산과 미얀마 완전독립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타킨 지도자들은 바모와 연합했으나 바모와 우 누는 체포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협력으로 독립을 얻고자 하여, 아웅 산은 30명의 타킨을 일본으로 밀파하여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게 한 후, 1941년 방콕에 모여 미얀마 독립 쟁취를 맹세하였다.

 

이들은 일군이 진주하자 영국에 선전포고까지 하면서 일본에 협력하였다. 아웅 산, 네윈 등은 일본의 미얀마 독립 약속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일본은 정복자 행세를 하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타킨 지도자들은 일본이 미얀마를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얀마의 민족주의자들은 영국과 접촉하였고, 1944년에는 반일범국민연합전선이 결성되었으며,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이 이끄는 미얀마군대가 연합군에 합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웅 산과 애틀리 협상으로 1948년 1월 미얀마는 완전히 독립되었다.

4. 호치민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식민통치는 철저하여 지금까지의 반중 감정보다 훨씬 반불 감정이 강해졌다. 판 보이 차우는 1912년에 월남 광복회를 조직하여 프랑스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반불 투쟁은 계속되었으나 실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여 1927년에는 우엔 다이 혹이 베트남 국민당을, 1930년에는 우엔 아이 콕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5. 괴뢰정권 바오 다이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하고 보 구엔 지압이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자, 일본은 이에 대처해서 1945년 3월 바오 다이를 왕으로 하는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일본이 패전하자 베트민은 바오 다이를 퇴위시키고 1945년 8월 호찌민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하노이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민에게 최소한의 양보만 하고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립하려고 기도하여, 베트민과 프랑스 간의 8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 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서, 1949년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 왕국 원수로 추대하였다.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호찌민의 상대역으로 바오 다이를 택한 것이었다.

6. 라오스의 독립 

라오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유라오스당을 브양트얀에서 결성하여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독립 쟁취 방법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수파누봉과 온건파인 수바나 푸마가 대립되었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7. 시아누크 

캄보디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지원으로 반일지하운동을 전개하여 자유크메르군을 조직하였다. 자유 크메르는 종전 후 민족주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다시 프랑스의 지배에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타이가 차지했던 바탐방과 시엠레아프는 다시 캄보디아에 반환되었다.

 

시아누크는 자유크메르세력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양보를 받아 내어 캄보디아는 1948년에는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국이 되고, 195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완전 독립되었으며, 1955년에는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8. 말레이 국가연맹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년간 말레이시아는 일본군의 점령 아래 있었다. 전후 영국 정부는 말레이시아의 11 소국 지배자들에게 영국 총통이 관장하는 연맹국가 창설을 권유했으나, 이에 반대하자 1948년 말레이국가연맹이 탄생되었다. 이 당시 항일 게릴라전을 벌렸던 공산군이 테러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템플러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9. 이슬람 동맹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이슬람교도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1912년 설립된 이슬람 동맹은 서양인의 기독교 선교활동을 방해하였으며, 점차 급진적으로 변하여 처음에는 자치만을 요구하다가 마침내는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네덜란드인 스네블리에트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다 추방되었으나, 1920년에 인도네시아공산당이 창립되었다.

10. 수카르노와 핫타

1927년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국민당을 결성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가 이를 불법화하자 1930년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점령으로 다시 활발하였다. 1942년 초 일본의 침입에 대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별 저항을 하지 않았지만 일본이 점차 인도네시아인들을 압박함으로써 그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였다.

 

수카르노나 하사와 같은 민족주의자는 소극적이나마 일본 지배에 협조하였다.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이 선포되었으나 네덜란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유엔과 미국의 주선으로 1949년에는 명목상으로만 네덜란드와 연합한 인도네시아 합중국이 탄생하게 되어, 초대 대통령에 수카르노, 수상에 핫타가 선출되었다. 1950년에는 연방제를 폐기하고 인도네시아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점차 필리핀에 자치권을 부여하여 독립의 길을 열어 주었다. 1934년 타이딩스, 넥더피법에 의해 필리핀은 미국의 자치령이 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케손이 선출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케손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가서 망명정부를 운영하였다. 1944년 케손의 사망으로 오스메나가 대통령이 되었고 미군의 필리핀상륙으로 망명정부도 귀환하였다.

11. 막사이사이

1946년 7월 4일 미국은 필리핀에게 완전독립을 부여하였으며, 로하스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로하스 정부는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국내 정치가 불안하였고, 퀴리노가 대통령일 때는 후크단의 위협이 있었다. 원래 후크단은 반일 게릴라 활동을 했는데, 일본이 물러난 후 공산당과 합세하여 폭력을 통한 정부의 전복을 노렸으나 막사이사이에 의해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