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마 6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타이의 여론은 친독적이었다. 일찍이 영국과 프랑스에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고 독일은 철도개발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마 6세는 중립을 지키다 1917년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결과 타이는 파기 강화 회의에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석했으며, 국제연맹에도 가입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불평등 조약 폐기를 위한 조략은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외무성 고문으로 있던 새(Sayre)의 역할이 컸다.
2. 피 분과 프리디
라마 7세 때인 1932년 피분, 프리디 등이 무혈혁명을 일으켜 타이는 입헌군주국이 되고, 국왕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헌정 혁명 이후 타이의 민족주의는 점점 국수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어 피분은 라타니움 정책을 표방하고, 1939년 국호도 사이암에서 타이로 바뀌어졌다.
3. 타이의 이중외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피분은 과거 영불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일본에 접근하게 되었다. 1941년 일본의 협조로 프랑스에 빼앗겼던 캄보디아의 일부 지역을 되돌려 받았다. 한편 일본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타이는 미국에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 1월 일본의 강압으로 공수 동맹을 체결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4. 자유 타이 운동
그러나 주미대사 세니는 타이의 대미 선전이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을 설득 하여 반일 지하 항쟁인 자유 타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프리디도 타이 내에서 반일세력을 규합하여 미국의 호의를 얻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타이는 패전국 취급을 받지 않고 18개월 후에는 국제연합에도 가입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와 같은 피분의 친일, 프리디의 친미 외교 즉 이중 외교가 타이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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