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틀러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한편 독소전쟁을 2개월 앞둔 시기인 1941년 4월 6일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1940년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6주 만에 항복 선언하게 만든 것을 봐야 합니다. 그 이후 독일은 두 가지 방향의 전략적 목표가 생깁니다.
첫째, 영국의 패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영국의 핵심지역인 지중해 지역을 장악해야 합니다.
독일은 영국과 인도와의 무역통로였던 중동 지대를 거쳐 그 통로를 잇는 지중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야 영국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소련을 침공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발칸반도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독일이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물론 동맹인 이탈리아도 있지만 역시 그리스 지역이 관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그리스 지역을 장악해야 하는데, 독일의 영토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리스 방향으로 쭉 내려가려면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또한 두번째 목표인 소련 침공에 있어서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를 장악하는 것이 더 수월합니다. 그런데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배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독일의 전략적인 목표를 위해서 유고슬라비아 침공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친다면 그리스가 또 뒤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히틀러는 발칸반도에 지속적으로 회유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에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독일의 회유에 포섭당하게 되지만 친서방국인 유고슬라비아는 이러한 독일의 회유에도 저항합니다.
2. 독일에 항복할 것을 결정하다
한편, 그리스에는 영국의 지원군이 있었습니다. 이는 영국이 독일이 그리스로 진군할 것을 대비해서 영국 본토가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2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 여단을 그리스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에는 영국의 공군기지가 있었고 그리스에서 일단 항공기가 뜨면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지대를 공략할 수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여러모로 눈엣가시인 그리스를 계속 회유했지만 친영파였던 그리스는 계속해서 거부합니다. 그러나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에 굴복하여 1941년 3월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 동맹에 붙기로 결정합니다.
3. 친서방파의 쿠데타
유고슬라비아 내 친서방 파는 이에 반대하고,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게 됩니다. 쿠데타의 성공으로 유고슬라비아의 항복은 취소되고 히틀러는 이 사실에 격노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단 이틀만에 작전 지령을 만들어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결정합니다. 3월 26일에 유고슬라비아가 쿠데타가 있었는데, 3월 31일 날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공격 개시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독일이 독소전쟁 준비 중에도 이렇게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던 요인은 포섭한 불가리아 지역에 이미 제1기갑 집단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리한 결정이었지요. 그래서 그나마 늦춘 것이 1941년 4월 6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작전명을 지을 시간도 없어서 그냥 총통 지령 25호 작전으로 명명되었습니다.
4. 유고슬라비아와 독일의 전쟁
물론 이러한 독일의 침략에 대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무방비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병력 동원체제는 잘 마련되어 있어서 예비군까지 총동원하면 약 1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침공 직전에는 약 70만 명까지 동원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조직력과 민족적 갈등이었습니다. 특히 크로아티아 쪽 군대는 아예 싸울 열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일 정도였습니다. 크로아티아가 이토록 유고 왕국에 반감을 가졌던 이유는 크로아티아가 이미 예전부터 세르비아와 사이가 안 좋았고 유고 왕국에서 진작부터 분리 독립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갈등을 살펴보면, 세르비아인에 의한 크로아티아 정치인 암살사건뿐만 아니라 1929년 유고 왕국이 성립할 당시에도 크로아티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왕정 독재를 강행한 역사적 사실도 있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는 유고 왕국에 충성할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5.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다
한편, 독일군은 전격전으로 신속하게 유고슬라비아의 핵심 거점인 베오 그라드 및 주요 도시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헝가리 쪽과 불가리아 쪽에서 양방향으로 베오그라드를 향해 공격하는 pincer attack를 감행합니다. 불가리아 쪽에서도 공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그쪽에서 독일군이 그리스 침공을 위해 병력을 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군의 pincer attack이 개시되면서 제일 먼저 독일의 자랑이었던 공군이 먼저 베오그라드를 때리기 시작합니다. 수평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를 이용한 테러공격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독일 전격전의 상징인 독일 기갑부대가 진군합니다. 이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크로아티아 군의 항복으로 크로아티아 전선은 맥없이 무너집니다. 그 틈에 독일은 불가리아에서 그리스 국경을 차단한 후 베오그라드로 진격을 해갑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건은 저항의지가 꺾인 유고 왕국의 핵심도시 베오그라드가 독일군 단 1개 분대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 사건입니다.
루마니아에서 출발한 제41 차량화 군단 소속부대가 바로 무장친위대 독일 무장친위대 라이히 사단이 소속되어있었고 차량화 보병연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가 있었습니다. 라이히 사단은 히틀러에 충성하는 나치당의 군대였기 때문에 굉장히 공격적이고 잔혹한 부대였습니다. 이때 라이히 소속의 프리츠 클링엔베르크 대위가 활약합니다. 프리츠 대위는 위력 수색, 기동타격 임무를 맡은 오토바이 보병대대의 중대장이었습니다. 오토바이 보병대대는 선봉에서 공격을 담당했는데 그들의 목표는 베오그라드로 빠른 진격을 해서 다뉴브강 교량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941년 4월 12일 오전에 판체보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이미 교량은 유고슬라비아군이 다 끊어버린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츠 대위는 몇 개 안 되는 보트에 오토바이를 싣고 강을 건넙니다. 그래서 11시쯤에 다뉴브강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엔 낡은 모터보트 한 대밖에 없었는데, 때문에 오토바이도 버리고 프리츠 대위는 기관총만 들고서 1개 분대를 데리고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1개분대밖에 옮기지 못한 모터보트가 돌아가던 중 그만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어 버립니다.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여기서 다른 대원들이 건너올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그러나 프리츠 대위는 지나치게 호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1개 분대만 가지고 베오그라드로 진격을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베오그라드 안쪽까지 들어간 프리츠 대위의 분대는 기관총을 쏘아대면서 독일군 주력부대가 왔으니 항복하라고 겁박합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겁을 먹게 됩니다. 속수무책으로 진입을 허용하게 되고 결국 1개 분대에 의해 베오그라드 시장이 항복을 선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10여 명의 독일군이 1000여 명을 포로로 잡은 유래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유고슬라비아가 독일군에게 지레 겁을 먹은 것은 당시 독일의 선전효과가 컸습니다. 독일이 이미 프랑스와 폴란드의 성공적인 침공 사건을 선전 영화로 유럽에 뿌려놓은 것이지요. 그런 선전영화를 접한 유럽인들은 독일군은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인식이 있었고 전격전을 펼치는 독일군에게 자연스레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단 11일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에게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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