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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중세인도문명. 인도 중세사회와 문화의 발전

by 니루루 2022. 9. 24.

 

1. 8~12세기의 인도 사회

굽타가 몰락한 후 봉건 제후들의 패권 다툼 속에서 북부 인도는 7세기 초 카나우즈의 하르샤 바르다나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 후 8세기를 전후하여 인도는 동부의 팔라, 서부의 프라티 하라, 데칸을 중심으로 한 라슈트라쿠타의 세 나라로 갈렸다. 이 때는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침입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불안하였다. 종교는 밀교가 융성하고 불교와 자이나교가 크게 위축되었다. 불교사원 날란다와 비크라 마쉴라는 세계적인 교육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육은 종교, 철학, 문법학 등만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고대에 발달한 과학의 수준을 계승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학문도 발달하지 못했다. 9~12세기까지의 남부 인도에는 촐라라는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촐라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군사 원정을 하였고,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무역을 확장하였다. 이 시대는 정치, 경제, 문화에 걸쳐 남부 인도의 최고 전성기였다.

 

2. 델리 술탄 시대의 사회와 문화

8세기 초 가즈나의 마흐무드가 침략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인도 침입이 시작되었다. 연이어 구르의 마호메트가 침입하였고, 그의 마메룩(현지 차출 후계자)인 쿠틉 웃딘 아이박이 델리에서 술탄에 즉위하면서 델리 술탄 왕조가 시작되었다. 델리 술탄은 전제군주였으며, 강력한 귀족세력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대부분이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하였다. 힌두들은 지즈야(인두세)를 납부하여야 했고, 힌두의 사원들은 거의 파괴되고 그 자리에 이슬람의 모스크가 세워졌다. 델리술탄 왕조는 1206년 마메룩 왕조로 시작하여 칼지 왕조, 투글락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로 이어져 오면서 북부 인도를 300여 년동안 통치하였다. 멸망 후 북부 인도는 정치적으로 혼란상태에 빠지고 남부는 데칸을 중심으로 한 바흐마니 술탄 왕조와 인도반도를 중심으로 비자야 나가라 왕조가 유지되면서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 경제적으로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흥성하였다.

 

3. 무굴 시대의 사회와 문화

중앙아시아 출신인 바바르가 인도를 침입하여 1526년 로디 술탄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창건하였다. 바바르의 뒤를 이어 후마윤, 악바르가 즉위하였다. 악바르는 궁정 내의 많은 귀족세력과 지방 토후들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제국의 기초를 굳건히 다졌다. 그는 많은 농업개혁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그것은 농민의 이익 확대와 국고수입의 증대를 가져왔다. 악바르는 봉건적 군사 관료제도를 정착시켰다. 관리는 왕에 의해 모집, 승진, 해고 등이 직접 이루어졌으며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의해 악바르는 강력한 귀족 관료들을 육성하였고 그들은 왕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악바르는 바바르 이후 유지되어 온 힌두와 이슬람 간의 종교 융화 정신을 살려 지즈야를 폐지하고 만인 평화정책을 채택하였다.

 

또 모든 종교를 하나의 유일신 사상으로 통합하여 장려하였다. 악바르가 시작한 본격적인 영토확장정책은 자한기르에 계승되었고, 이어 샤 자한에 의해 인도가 거의 통일되었다. 그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국내외 교역에 힘쓰며 최고의 절정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그를 이은 아우랑제브는 종교 융합정책을 포기하면서 힌두들의 심각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또 토후 세력과의 소모전을 무리하게 벌이면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가 죽은 뒤 강력한 군주가 뒤를 잇지 못한 채 귀족들의 부패와 토후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지면서 무굴 제국은 쇠퇴해져 갔다. 이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흥성하였으며, 상인들 간에는 높은 수준의 직업주의가 발달하였고 많은 조율의 무역 조합이나 금융행위가 성행하였다. 또한 여러 산업이 발달하였고 인도의 제품이 유럽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유럽과의 무역흑자로 유입된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는 국가 전체로 볼 때 매우 부유하였으나, 민중들과 귀족, 자민다르(지주) 사이의 생활수준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귀족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대단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자민다르도 자신의 사유지 수입과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국유지의 조세징수를 통해 높은 경제 수준과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