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아바스 왕조
우마위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의 변화는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음모나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하부조직과 선전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왕조의 수도를 아랍 중심의 다마스쿠스에서 페르시아 문화의 바탕인 바그다드로 옮긴 사실에서도 나타나지만, 아바스 지배층은 아랍계와 비아랍계 모슬렘의 조화로운 융합을 꾀하였다. 따라서 아바스 왕조는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후대 사가들은 흔히 우마위야 왕조까지를 아랍인이 이민족을 지배한 '아랍제국시대'로 칭한 반면, 아바스 왕조를 '이슬람 제국'이라 부르고 있다.
탈아랍화 정책
이 왕조에서는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활발히 추진되어 아랍, 시리아, 페르시 아적인 요소들이 골고루 융합된 보다 폭넓은 이슬람 문화가 발전하여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복민으로서의 아랍 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이슬람의 전파자, 수호자로서의 아랍인, 즉 인종적 의미의 아랍인에서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으며, 스스로 아랍인이라 자칭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문화적 개념의 아랍인이 보편화되었다. 이런 아랍화 물결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전역에 번져, 오늘날의 아랍권이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교류의 전성기
아바스 왕조는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쉬드와 그의 아들 마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의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고, 활발한 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 문물이 물밀듯이 유입되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제지술이 도입되자, 종이 혁명을 가져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었고 학문이 꽃을 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제지술의 도입은 751년 아바스 군대의 이븐 살리히 장군과 당군의 고선지 장군과의 탈라스 전투의 결과인데, 중국이 이슬람군에 패함으로써 포로로 잡힌 중국의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 전역에 확산되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아랍 사료에서 신라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와 아랍세계와의 긴밀한 교류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아바스 왕조의 몰락
아바스 왕조도 제국의 영토가 방대하고 중앙정부의 내분과 지방 총독들의 할거, 이민족의 잦은 침입 등으로 9세기 중엽부터는 급격히 쇠약해졌다. 우마위야 왕조가 망한 뒤 그 일파가 스페인에 세운 후 우마위야 왕조의 통치자가 969년 스스로 칼리프로 자칭하며 바그다드에 맞섰고,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독립하여 파티마 왕조를 열었다. 또한 바그다드의 약화는 중앙아시아 지방에 할거하던 이란 계와 투르트계 군소국가들의 성장을 자극하였다. 소그드지방의 사만 왕조와 카스피해 남쪽의 브와이브 왕조는 이란문화를 표방하였다. 투르트계로서는 카라한 왕조와 가즈나 왕조가 특히 중요한데, 이 왕조가 이슬람화됨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트계 종족들의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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