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종교개혁운동
영국의 근대사상과 교육의 도입에 따라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도 내에서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사회개혁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람 모한 로이의 브라모 사마즈를 들 수 있다.
로이는 인도 사상의 위대함을 주창하였으나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그 도구로서 서구문화를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카스트제도의 엄격성, 우상숭배, 의식주의 등을 반대하고 사티, 조혼 등의 악습을 폐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인권신장, 남녀평등 등을 옹호하고 홍보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일어난 이러한 종교 사회개혁운동은 1857년 대반란 이후에도 계속되어 민족운동과 독립투쟁으로 연결되었다.
1857년 대반란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지 약 100년 만인 1857년에 델리 부근의 메리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영국군 세포이(용병)들의 불만에 의한 단순한 폭동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식민수탈과 압제에 대한 인도 민중들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적인 반영 제국주의 투쟁으로 성장하였다.
전국의 거의 모든 농민과 수공업자등이 순식간에 이 투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형식에 있어서 무굴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민족적 거사로 성장시키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영국지배하에 있던 소군 주들과 토후 세력들, 그리고 지식인, 지주, 도시상인 등은 가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시각을 갖추지 못하였다.
결국 이 대반란은 약 2년여 만에 실패로 끝난다.
1859년 부활한 제국주의 영국은 무굴황제 바하두르 샤를 폐위시킴으로써 무굴제국을 종식시켰다.
동시에 영국의회는 인도의 통치권을 동인도회사에서 정부에 이양시키고 총 독일인 통치의 권한을 극대화시켜 보다 효율적인 직접통치에 들어갔다.
반면에 민중들의 불만의 원인이 된 토후국에 대한 병합정책은 포기하고 대반란진압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토후국들을 괴뢰 독립국으로 유지시켰다.
그리고 불만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이 된 인도사회에 대한 개혁정책도 포기하였다.
1857년 대반란은 식민통치 100년 만에 식민지 땅에 영령 인도제국의 완성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대반란은 비록 구태의연한 방식이었으나 반영제국주의 투쟁의 시발이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근대민족주의가 태동하고 이후의 독립투쟁에 애국 애족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인도 국민회의와 민족운동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도에는 모든 계급, 분파, 종교 등을 초월하는 민족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이것의 직접 원인은 농민, 수공업자, 노동자들의 제국주의의 수탈과 압제에 대한 반발이었다.
여기에 지식인과 산업자본가들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본질파악이 상승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영국이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도입한 근대행정제도와 경제적 단일체의 형성, 철도, 전신, 체신망의 전국적 확산 등이 간접 원인의 역할을 하였다.
서구 사상과 교육제도의 확산, 언론과 문학의 확산, 서구인들의 역사왜곡에 대한 반발로서의 과거의 재발견과, 그로 인한 문화적 자긍심의 고취 등도 민족운동의 중요한 발생원인이었다.
인도의 민족운동은 1885년에 창립한 인도 국민회의가 본격적으로 주도하였다.
인도국민회의는 "영국 통치를 파괴시킬지도 모를 압력 세력에 대한 안전밸브로서" 영국인들이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인도 국민회의는 친영의 입장을 지닌 온건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온건파는 인도국민회의를 정부의 안정적 통치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 단체로서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완전자치나 독립을 주장하는 대신 대영제국의 신민임을 자처하고 대영제국의 일부로서 존재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주로 결의문 채택 등을 통해 정부에 건의하는 식의 소극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총독은 반발하였으나, 많은 국민들은 지지하였다.
그러나 온건파의 소극적인 행동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전혀 얻어내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치게 되었다.
이즈음 1905년 커즌 총독은 민족운동의 악화를 노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벵골 지방을 동과 서로 분할한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정책은 그 지역민과 전체 국민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인도국민회의에 급진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기근의 참사로 인한 반영 제국주의 감정의 팽배,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가져다준 유럽 세력에 대한 자신감 등의 요인이 상승 작용하였다.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인물로 틸락, 오로빈도 고쉬 등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인도 고대문화의 부흥을 주장하면서 종교적 감정과 민족적 자긍심 등을 반영 감정으로 유도하여 모든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인도 국민회의 내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어 탈락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 또는 유배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마침내 벵골 분할 정책이 취소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폭력파와 이슬람 운동이 민족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후자의 등장은 종교 분파주의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탈락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는 독립을 향한 전략적 차원에서 영국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은 민중들의 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이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1916년 인도 국민회의 라크노우회의에서 결실을 맺었고, 온건파와 급진파는 물론 이슬람 리그도 하나도 합세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자치운동인 스와라즈 운동이 시작되었다.
'문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남아시아 역사 (0) | 2022.09.30 |
---|---|
근대인도문명 5편. (0) | 2022.09.28 |
근대인도문명 3편. (0) | 2022.09.27 |
근대인도문명 2편. 영국의 잔혹한 인도식민정책 (0) | 2022.09.26 |
근대인도문명 1편. 영국의 인도침략 (0) | 2022.09.25 |